실재(實在)란 무엇일까? 우리는 감각기관을 통해 경험하는 대상들을 객체로서 지각하고 인지한다. 하지만 인식론적 관점에서 그것들은 모두 ‘나’라는 존재와 독립된 객관적 실체가 아닌, ‘나’와의 관계를 투영하는 주관적인 사유대상이며, ‘나’라는 주체의 감각경험에 대한 직관적 모사, 즉 이미지(心像)로서 존재할 수 있을 뿐이다. 여기서 감각이란 주체의 주관적 인식의 틀을 벗어날 수 없으므로, 결과적으로 모사된 이미지 역시 상대적일 수 밖에 없다. 어떤 대상의 의미는 그 대상 자체의 속성이 아닌, 그것을 포함하는 사물들 간의 유기적인 관계에 따라 규정되며, 그것은 대상의 층위와 그것이 속한 관계망의 체계에 따라 고정되지 않고 상대적으로 변화한다는 인식을 전제로 한 구조주의 철학에서도 엿볼 수 있듯이, ‘객관성’이란 단지 소통의 편의를 위해 만들어진 관념적 허상에 불과하다. 결국 각자의 경험이 서로 한없이 동일하게 느껴질 수 있을 뿐, 모든 주체들이 동일하게 인식하는 절대적이고 객관적인 실체는 존재하지 않거나, 혹은 그 존재를 확인할 방법이 없다. 우리는 다만 각자의 인식세계에 맺혀진 상(像)을 통해 불확실하고 제한적인 소통을 할 수 있을 뿐이다. 다시 말해, 어떤 대상에 대한 ‘실체’는 관찰자의 시점에 따라 무한히 발생하는 소실점과도 같이 세계-내(世界-內) 인식주체의 개체수 만큼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
이처럼 우리가 인식하는 것은 대상에 대한 이미지일 뿐이며, 그것은 모두에게 동일한 것이 아니다. 이미지(image)는 사전적으로 ‘마음속에 언어로 그리는 그림(mental picture)’으로 정의되는 추상관념이다. 하지만 우리가 어떤 ‘이미지’를 떠올릴 때, 흔히 그것을 시각적으로 구현화된 표상, 혹은 장면 등으로 인지하는 것은 인식의 근간이 되는 감각 중 시각에 대한 의존도가 상대적으로 크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면 인간의 망막은 과연 얼마나 정확하게 사물을 비추며, 우리는 얼마나 정확하게 사물을 인지할까. 예를 들어, 우리가 관념상으로 이해하는 입방체의 면은 여섯 개이지만, 실제로 우리가 동시에 ‘볼 수 있는’ 면은 시점에 따라 최대 세 면 까지이다. 우리가 그것을 육면체로 인식하는 것은 직관에 의한 것이 아닌, 다양한 시점을 통해 얻어진 시각정보들을 종합하여 도출한 인지작용의 결과이다. 바꾸어 말하면, 우리는 3차원의 입체(혹은 공간)조차 추론이나 추상(抽象)을 거치지 않고서는 오롯이 인식할 수 없다는 말이다.
작가의 작업은 사물의 본질에 대한 사유에서 시작되어, 실재와 형상의 간극에 주목하는 것으로 이어진다. 일련의 작품에서 작가는 기하학적 공간도형에 대한 이미지를 해체하여 그 조각들을 평면상에 재구성하고, 다시 각각의 층위에 따라 공간 안에 재배치하는 방법론을 제시한다. 개체로는 단지 추상적인 형상에 불과한 시각정보들의 집합이 일정한 체계와 특정시점에 따라 공간감을 가지는 하나의 오브제로 인식되는 과정은 입체공간에 대한 비직관성(非直觀性)을 조명하는 한편으로, 대상에 대한 상대적 실체의 관념을 구현한다. 작가는 2차원 위에 3차원을 표현하기 위한 원근법의 착시와 환영을 입체공간에 적용하는 역설적인 접근방법을 통해, 작가가 유도하는 시점(視點)과 관찰자의 시점을 대비시키며, ‘본다’는 원초적 인식행위의 불확실성에 대한 화두를 던진다. 주체들 각자의 망막에 비추어지는 대상의 형상이 상대적이듯이, 실체란 그러한 불확실성 속에서 정처없이 부유하는 상대적인 표상일 뿐이다. 작품 안에서 작가가 드러내고자 하는 것은 눈에 ‘보여지는 대상’의 본질이 아닌, 그것을 ‘바라보는 대상’의 정지된 시선이다.